보은 최감찰댁 이야기 ;서느실 최씨
보은지방의 화순 최씨 부정공파 집성촌이 예전에는 거리고개로 알고있다.
선곡에 화순 최씨가 정착한 것은 고원 군수공의 증손인 덕휘공께서 금적산 북쪽인 서느실로 오신 때문으로 알고있다. 이분이 광자 심자 쓰시는 나의 6대 조부시다. 이분께서는 선와공 형제분을 두셨다. 치자 휘자 쓰시는 선와공께서는 봉진 학진 구진 삼형제 분을 두셨고 동생분은 후사가 없으셨다. 그래서 삼남께서 선와공 동생 분께 양자로 가셨다. 그래서 아버지 대(夏字 代)는 윗말 아랫말 모두 10촌내 친척이 된다.
봉자 진자 할아버지께서는 나의 고조부가 되신다. 이분께서 육 형제 분을 두셔서 윗말은 나의 증조부 대에 육 대소가가 되었다.
두째 고조부께서는 외 아드님을 두셨고, 아랫말로 출계된 세째분께서는 삼형제 분을 두셨다. 참고로 삼형제 분중 맨 아랫 분이 해방후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신 면자 수자 쓰시는 풍기 할아버지이시다.
서느실의 중심은 윗말과 아랫말이다. 가끔 상윗말과 중간말이라 하기도 했으나 두마을을 모두 윗말이라 했다. 감찰댁은 윗말과 아랫말의 종가댁이며 윗말의 큰댁이다. 나의 증조부께서 조선조 말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을 지내셔서 우리집 택호가 감찰댁이 되었다. 아랫말의 큰댁은 택호가 참봉댁이다. 그러나 아랫말 대소가도 더 높은 관직에 많이 출사하셨다고 들었다. 윗말 아랫말 대소가의 재산도 전 답 임야 등 매우많아 서느실 황토말 사골 사그막(적암) 덕동 우진 서원 송죽 하너물(둔덕) 장안 납시기 지산 거현 광촌 묘서 옥천 청산면 대성리 만월리 및 구미 등에 산재해 있었다. 내가 듣기로는 아랫말 재산이 더 많았다고 한다.
윗말 우리집에서 왼쪽으로 나가면 방아간이 있었고 다시 왼쪽 신작로 끝나는 곳 오른편 마을회관 뒤쪽에 있는 집은 작은댁 작은 할아버지 댁(시하 아저씨 살던 집)이었다. 고샅터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편 지금의 밭은 닷째댁(현하아저씨) 자리다. 고샅을 따라 들어가 세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따라가면 왼편에 생가 작은 할아버지댁(대동댁)과 세째댁(재구형 집)이있고 오른편에 작은댁(충하 아저씨 집)과 아버지 생가가 있었다. 골목을 따라 들어가 왼쪽으로 돌면 오른편에 풍기댁이 있었고 죽 나아가 또랑 전에 다시 왼쪽으로 돌아오면 왼편에 두째 고조부 댁(개멱댁,재광이네)이 있고 옆에 아버지 생가댁(최재한가옥)이 우리집과 한 울타리 안에 있었다.
방학이 되면 대개 종업식 하는 날 청주에서 버스로 보은을 갔다. 집에 가면 먼저 사랑채 할아버지께 절하고 안에 들어가 할머니께 절하고 책가방을 풀고 작은 사랑방 옆 쪽문으로 생가댁(네째댁)에 건너가 할머니 세째 아버지 어머니께 절하고는 밖으로 튀어나가 각 대 소가에 들러 절을 했다.
그러면 자연히 충하아저씨 시하아저씨 재구형 등 위아래 또래들이 여러명 모이게 되고 밥먹는 시간 외는 종일 산과 들로 쏘다니며 놀았다.
어제 일 같은데 지금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도 몸이 아파 거동이 불편한 사람도 있다. 오십 여년의 세월은 어쩔 수 없나보다.
봄날 아지랑이 피듯 지난 날이 떠오른다.
집 샆작을 나가 지금은 빈터인 행랑채를 통하여 왼쪽으로 나간다.
신작로 끝나는곳 사과 그림이 있는 건물 터에 방앗간이 있었다. 일가인 방앗간댁 아주머니께서는 지금 아랫말에 사신다.
신작로 끝 마을회관 오른쪽 집이 시하 아저씨 집
마을회관 안쪽 지금은 밭이된 닷째댁 자리
고샅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집사람, 세갈래 길에서 왼 편으로 가면 사당이 있었다.
길옆 왼쪽 빈터가 사당 터, 밤에는 무서웠다. 그뒤쪽이 대동댁과 세째댁, 길 오른쪽 빈터가 작은댁(충하 아저씨 집)과 아버지 생가터(네째댁)
생가 작은 할아버지 댁(대동댁) 안채, 사랑채는 안채 왼쪽에 있다.
세째댁(재구형 집); 지금 86세이신 당숙모께서 사신다. 입구 왼쪽 밭은 사랑채 자리
세째댁에서 더들어가서 왼쪽으로 가면 길 우측에 풍기 할아버지댁이 있었다.
풍기댁에서 더나가면 길이 앞또랑과 만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개멱댁이다.
길 왼편이 개멱댁
개멱댁 옆 네째댁(아버지 생가댁;최재한 가옥); 사진 오른쪽 기와집이 우리집(감찰댁) 그시절에는 두집이 한울안 (선곡리 281번지)에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