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사랑채 기와가 많이 깨지고 석가래가 썩어 아버지께서 청주에 있는 염토수(주택)와 대목을 들여 기와및 석가래를 교체하고 전통 방식으로 사랑채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셨다. 이때 사랑 대문간채는 다시 지으셔서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2-3년전 어떤 지관이 방문하여 사랑 대문간채가 풍수에 잘 맞지 않는다 하였는데 재건축때 목수와 토수들은 양택 풍수를 생각하지 않고 지은것 같다. 꼭 믿지는 않더라도 이왕이면 한옥 대목들은 지금도 풍수에 맞게 집을 지었으면 좋겠다.
공식적인 최태하가옥 건축 연도는 사랑채 안채 모두 1892년으로 되어 있으나 필자는 아버지께서 사랑채를 보수하실 때 나온 여러가지 증거로 사랑채 건축 년도는 더 오래된 것으로 생각한다.
1983년 사랑채 보수시 대들보에 있는 상량함에서 먹으로 `숭정 기원후 임술` 이라고 쓴 한지가 나와 목수가 아버지께 베껴 적어 드렸으며 이것을 내가 간직하고 있다. 이것으로 볼때 사랑채는 숙종 임금때인 1682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외에 안채와 부속 건물은 숭정 기원후 오임진(1892년)에 지어졌다.
내가 어릴때 이집은 숙종때 지었다고 들었으며 고조부께서 재산을 많이 모으셔서 담안 채마밭 뒤에서 이집으로 이사오셨다고 들었다. 이집 지적도 상에 현재 담밖의 집도 이집 소유다.
추측컨대 고조부께서 이집을 사서 이사 오시고 증조부께서 안채를 다시 지으신것 같다.
사랑 마당의 회화나무도 수령이 200년으로 되어있으나 내가 어릴때도 어른 두명이 두팔로 겨우 껴 안을 수 있었다. 이 회화나무도 수령이 200여년보다 더 많다고 추측된다. 그리고 1892년에 사랑채가 지어졌다면 집짓기 전에 정원을 먼저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언가 잘맞지않는다.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는 건축된 양식과 목재의 오래된 정도가 일반인이 봐도 확연이 다르다. 또 뜨럭에서 마루로 오를때 밟게되는 마루 모서리의 닳은 정도가 안채는 매우 적고 사랑채는 매우 심하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사랑채 건축 년도는 숭정 기원후 임술년인 1682년이 정확한 것 같다.
*숭정 기원후; 중화의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의 청이 점령함에 이조의 조정은 만주 오랑캐를 얕보고 조선을 소 중화라 일컽고, 연호도 청을 따르지 않고 패망전 명 황제가 쓰던 "숭정"을 따라 쓴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숭정기원후 임술은 명이 망한후 (즉 숭정 연호를 쓴 이후) 첫번째 임술년을 오임진은 다섯번째 임진년을 뜻한다.*
*최태하 가옥은 1984년 1월14일 국가지정 중요 민속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듣기로, 오대조 및 고조부께서는 남의 집에 마실을 가셨다가도 비료가 되는 소변은 집에오셔서 보시고 다시 가셨다고 한다. 이런 정도로 근검 절약하시어 재산을 모으신 것으로 들었으며, 우리 후손들도 깊이 생각해 본 받아야 할것으로 사료된다.*
맨아래 청주 염주택(토수) 전화번호와 1983년 아버지께서 쓰신 보수일지
목수가 필사한 상량문과 사랑채 보수 시방서
아버지께서 적으신 사랑채와 안채 상량문과 사랑채와 안채 보수 날자
안채 안방(왼쪽)과 윗방
사랑채 안방(오른쪽)과 윗방
안채 마루 모서리
사랑채 마루 모서리
많이 닳은 사랑마루 모서리 확대사진 ;모서리 각이 거의 없다.
사랑 마루 측면사진;기둥과 모서리가 많이 닳아 둥근 형태에 옹이만 튀어 나와 있다.
지적도와 현재의 담 ,담장밖 4번 부위의 집은 임대료를 내고 타인이 산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은 최감찰댁 이야기; 성주신 (0) | 2013.07.15 |
---|---|
보은 최감찰댁 이야기; 고려 곤충 연구소 김정환 소장 (0) | 2013.04.22 |
보은 최감찰댁 이야기; 눈 (0) | 2012.12.10 |
보은 최감찰댁 이야기; 최재한 가옥 (0) | 2012.11.26 |
보은 최감찰댁 이야기 (0) | 2012.11.05 |